익숙함에 균열을 내는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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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루할 틈이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보고 산다. 매일 새로운 콘텐츠가 올라오고, 새로운 공간이 문을 열고, 브랜드들은 신제품과 협업, 캠페인을 쉬지 않고 내놓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새로움이 많아질수록 오래 남는 것은 줄어든다. 방금 흥미로웠던 장면도 금세 익숙해지고, 사람들은 곧 다음 이야기로 이동한다. 브랜드도 같다. 어렵게 준비한 제품과 캠페인은 잠시 피드를 채우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새로움에 자리를 내준다. 그렇다면 브랜드가 정말 만들어야 하는 것은 더 큰 자극일까, 아니면 익숙한 일상을 다시 느끼게 하는 감각일까.

숏츠같은 브랜드가 가장 빨리 사라진다
일본의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는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서 현대인의 지루함이 자극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자극은 넘쳐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의 경험 안에 충분히 머무르는 힘이다. 지루해질 때마다 우리는 다른 영상을 보고, 다른 장소로 가고, 새로운 물건을 산다. 그 순간에는 분명 기분이 달라진다. 하지만 그 재미가 사라지는 속도도 빠르다. 새로운 것이 만족을 남기기보다, 다시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찾게 만들기 때문이다.
브랜드에 대입해보면 더 선명해진다. 많은 브랜드는 기분전환을 파는 산업 안에 있다. 고객의 지루함을 감지하고, 새로운 자극을 건네고, 그것이 익숙해질 때쯤 다시 다음 자극을 준비한다. 움직임은 멈추지 않지만, 정작 쌓이는 것은 많지 않다. 브랜드는 점점 빨라지고, 고객은 점점 무감각해진다.
자극을 파는 브랜드, 감각을 바꾸는 브랜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구분은 '한가함'과 '지루함'의 차이다. 한가함은 시간이 남아 있는 상황이고, 지루함은 그 시간을 대하는 사람의 감정이다. 같은 주말 오후라도 누군가는 동네를 걸으며 빛의 변화에 머무르고, 누군가는 숏폼을 아무리 넘겨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느낀다. 차이는 빈 시간의 양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서 무엇을 감각할 수 있는가에 있다.
저자는 이 감각의 깊이를 '사치'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치와는 다르다. 값비싼 것을 소유하거나 특별한 경험을 인증하는 일이 아니다. 이미 곁에 있는 것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커피를 마실 때 맛있다, 쓰다로 끝나는 사람이 있고, 향이 변하는 순간과 온도가 식어가는 결까지 느끼는 사람이 있다. 매일 걷던 길에서도 어느 날은 빛이 건물 사이에 머무는 방식이 보인다. 새로운 대상이 생긴 것이 아니다. 늘 지나치던 것들이 조금 더 자세히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브랜드에도 이 구분은 그대로 적용된다. 자극을 파는 브랜드는 고객에게 계속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한다. 존재 이유가 '새로움'에 있기 때문에, 새로움이 소진되면 브랜드도 함께 소진된다. 반면 감각을 바꾸는 브랜드는 고객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든다. 손을 씻는 일,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 물건을 고르는 기준. 모두 원래 일상 안에 있었지만, 어떤 브랜드를 경험한 뒤에는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솝이 파는 것은 단순히 향이 좋은 생활용품이 아니다. 이솝을 경험한 사람에게 손을 씻는 몇 초는 청결을 해결하는 시간이 아니라, 향과 촉감에 잠깐 머무는 시간이 된다. 무지가 파는 것도 저렴한 일상용품만은 아니다. 무지를 경험한 사람은 물건을 고를 때 '더 많이'가 아니라 '이 정도면 충분한가'를 묻게 된다. 블루보틀이 파는 것 역시 스페셜티 커피에만 머물지 않는다. 블루보틀을 경험한 사람은 한 잔을 빠르게 받아 마시는 것과 기다리며 맛보는 것의 차이를 알게 된다.
이 브랜드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새로운 제품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행동 안에 이전에 없던 의미를 담아낸다. 한번 새겨진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천문학자가 밤하늘을 이전처럼 볼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어떤 브랜드는 아주 평범한 일상을 다시 보게 만든다.
습관의 틈에서 시작되는 브랜드
사람은 습관을 만들어 세상을 빠르게 처리한다. 출근길, 점심 메뉴, 장을 보는 기준, 앱을 여는 순서까지 대부분의 선택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돌아간다. 효율적이지만, 그만큼 많은 것이 쉽게 무뎌진다. 반복되는 것들은 점점 배경이 되고, 너무 익숙한 것들은 더 이상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지루함이 생기는 방식이다.
좋은 브랜드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갑자기 던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오래 당연하게 여겨온 전제를 살짝 사선으로 바라본다. 병원은 원래 불안하다. 보험은 어렵고 귀찮다. 금융 앱은 기능이 중요하다. 생활용품은 가성비가 우선이다. 이런 생각들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 반복되어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전제가 되었을 뿐이다. 브랜드의 기회는 바로 이 습관의 틈에 있다. 흔한 예시이긴 하지만, 토스는 금융이 원래 어려운 것이라는 전제를 건드렸다. 복잡함을 단순히 줄인 것이 아니라, 금융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 자체를 다시 설계했다. 이 브랜드들이 한 일은 새로운 기능을 추가한 것이 아니다. 해당 카테고리를 받아들이는 소비자의 기본 전제를 다르게 바라본 것이다.
무엇을 발견해야 할까
그래서 디렉터의 일은 단순히 멋진 비주얼을 고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여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카테고리의 전제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다. 속옷은 정말 편하기만 하면 되는가. 병원은 꼭 차갑고 불안한 공간이어야 하는가. 제조업 브랜드는 성능과 숫자로만 신뢰를 말해야 하는가. 숙박은 잠을 자는 서비스에 불과한가.
좋은 디렉터는 이 당연한 인식 속에서 아직 언어가 붙지 않은 가치를 찾는다. 속옷이 몸을 존중하는 경험이 될 수 있는지, 병원이 불안을 낮추고 안심을 전하는 공간이 될 수 있는지, 제조의 정밀함이 단지 성능이 아니라 태도로 읽힐 수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 발견은 말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제품의 형태, 브랜드의 언어, 그래픽, 패키지, 공간, 웹사이트, 고객을 응대하는 방식까지 전부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한다. 고객은 브랜드가 무엇을 주장했는지보다, 실제로 무엇을 느끼게 했는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결국 디렉터는 고객이 하나의 카테고리를, 하나의 일상을, 전과 조금 다르게 느껴지도록 설계하는 사람이다.
브랜드를 만들기 전에 던져야 할 네 가지 질문
이 책의 프레임을 브랜드 기획에 적용하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점검해야 할 질문이 생긴다.
· 우리는 자극을 파는가, 감각을 만드는가.
론칭할 때는 신선하지만 반년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그것은 관심을 끈 것이지 경험을 만든 것이 아니다. 고객이 제품을 쓰는 방식이나 선택의 기준이 전과 달라졌다면, 브랜드는 단순한 소비를 넘어 감각의 층위를 하나 만든 것이다.
· 이 카테고리에서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는 전제는 무엇인가.
"속옷은 편하면 된다", "B2B는 기능을 설명하면 된다", "병원은 원래 그런 곳이다." 이 전제가 브랜드가 시작해야 할 지점이다. 좋은 브랜드는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전제를 다시 보게 한다.
· 신제품과 이벤트가 없는 달에도 우리를 떠올릴 이유가 있는가.
출시와 캠페인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존재감을 유지해야 한다면 브랜드는 영원히 바빠질 수밖에 없다. 고객이 일상에서 어떤 것을 고르거나, 어떤 공간을 경험할 때, 우리 브랜드가 만들어준 기준이 떠오른다면 관계는 이미 제품 밖으로 확장된 것이다.
· 브랜드가 사라진 뒤에도 남는 감정이 있는가.
로고가 사라져도, 매장이 문을 닫아도, 그 브랜드 때문에 손을 씻는 시간이 달라졌거나, 물건을 고르는 기준이 바뀌었거나, 자기 몸이나 생활을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같지 않다면 그 브랜드는 제품을 넘어 새로운 감각을 남긴 것이다.
기분전환 너머의 브랜드
더 깊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쉽게 지루해지지 않는다. 특별한 일을 계속 찾아다니지 않아도, 같은 하루 안에서 이전에 놓쳤던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잔의 음료, 한 번의 산책, 매일 반복하는 행동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다.
브랜드도 같다. 가장 오래 살아남는 브랜드는 고객에게 새로운 상품을 끝없이 보여주는 브랜드가 아니라, 고객이 이미 살고 있는 일상의 해상도를 한 단계 올려주는 브랜드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것을 조금 더 소중하게 받아들이게 하고, 익숙한 제품 안에서 이전에 없던 가치를 발견하게 하고,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고 왜 선택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물론 여기에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브랜드는 한순간의 강한 자극으로 높은 트래픽을 만들어야 하고, 빠르게 소비자의 인식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할 때도 있다. 론칭 초기의 화제성, 시즌 캠페인의 집중도, 단기 매출을 위한 이벤트는 분명 필요한 전략이다. 브랜드가 시장에 들어설 때는 조용한 깊이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순간도 있다.
다만 오래 살아남는 브랜드를 만들고자 한다면, 자극만으로는 부족하다. 매번 새로운 캠페인과 광고비로 관심을 다시 사와야 하는 브랜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반대로 고객의 일상 안에 하나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브랜드는 매번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떠오른다. 마케팅 효율의 관점에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한 번의 노출이 아니라, 노출 이후에도 남는 '느낌' 이다.
소음을 추가하는 브랜드가 아니라, 이미 곁에 있던 것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브랜드. 더 많이 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느끼게 만드는 브랜드.
결국 브랜드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삶에 또 하나의 자극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익숙해서 지나쳤던 것을 다시 보게 하고, 너무 당연해서 묻지 않았던 기준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일이다.
참고문헌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 고쿠분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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